본문 바로가기
문화/미술

서양 추상주의 미술 작품 상식

by 볼로냐라이브러리 2021. 7. 20.
반응형

서양 제국주의가 유럽 전역을 휩쓸 무렵에 사실주의적 기법에 한계를 느끼며 새롭게 회화 언어를 모색하던 중 야수주의와 입체주의가 탄생했습니다. 추상주의는 이러한 시도 끝에 존재하는 모든 것과 단절을 선언하며 등장한 예술운동입니다. 이후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며 대가들이 탄생하게 됩니다. 

 

추상주의 작품 1: 빨강, 노랑, 파랑의 구성

빨강, 노랑, 파랑과 검은 선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이 작품은 기호학적 추상화가 몬드리안이 오래 탐구한 끝에 도달해낸 결론입니다. 몬드리안은 현실에서 존재하는 특정 대상을 추상화한 게 아니며 세상과 우주의 완벽한 질서를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당시 몬드리안은 직관과 명상을 통하여 절대적인 진리에 도달하려는 신지학에 심취해있었습니다. 신지학에 따르면 세상은 겉으로는 불완전해 보여도 이면에서는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는 물질세계 이면에 숨겨진 영원하고 완벽한 진리를 표현하기 위해 회화적 실험을 했습니다. 몬드리안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절대 규칙에 따라 이루어져 있으며 이 규칙을 탐구하다 보면 결국 수직과 수평만 남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수직선과 수평선이 이루는 이상적인 균형이야말로 세상과 우주를 이루는 근본적인 질서라 믿었습니다. 이 작품은 가로선과 세로선이 격자 형태의 공간을 만들고 있습니다. 빨강, 파랑, 노랑의 삼원색이 칠해진 부분마다 각각의 무게감이 느껴집니다. 몬드리안은 격자 형태와 색채를 다양하게 조합하여 캔버스 안에서 완전한 질서를 추구해나갔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추상화를 그렸던 것은 아닙니다.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몬드리안은 젊은 시절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 아카데미에서 전통적인 미술교육을 받은 사실주의자였습니다. 1911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미술전에서 몬드리안은 입체주의를 접하고 강렬한 인상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더 큰 세상을 알기 위해 파리로 향합니다. 몬드리안은 피카소와 브라크가 이끄는 입체주의의 영향을 받아 기호학적인 형태로 쪼갠 다음 재조합하는 작업에 착수합니다. 그 과정에서 입체주의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자신만의 독자적인 방식을 고민하고 입체주의는 구사할수록 논리적인 결론과 멀어져 감을 느꼈고 입체주의가 표현하는 추상화는 그것이 마땅히 목표로 해야 할 절대적 본질이 아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본질을 표현하려면 순수 조형에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궤도를 수정한 그는 자신의 작업실에 박혀 조형주의 실험에 몰두합니다. 몬드리안은 화면에 자연이 남긴 정보 예를 들면 색이나 형태가 있으면 그것이 절대적 본질을 표현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불필요한 요소를 모두 제거하는 단순화 과정을 거쳐 본질에 도달하고자 했습니다. 수직과 수평의 검은 선들이 만들어내는 사각형 그리고 삼원색이 그가 다다른 결론이었습니다.

 

추상주의 작품 2: 흰색 위의 흰색

말레비치는 무언가를 표현한다라는 명제마저 과감히 없애버립니다. 이 작품은 순도 100퍼센트의 무입니다. 말레비치는 회화의 역사는 곧 대상에 속박당한 역사라 주장했습니다. 그는 회화가 대상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기를 갈망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예술을 절대주의라 명하고 예술의 독립성을 강조합니다. 독립성이란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고 자체만으로 완전하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회화는 물질적 세계에서 해방되어 회화만의 고유성을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마티스나 피카소가 회화를 재현의 기능에서 해방시켰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작품에는 무언가를 떠올리게 하는 대상이 있었습니다. 말레비치는 한발 더 나아가 회화가 진정한 독립을 쟁취하려면 대상에서 완전히 탈피해야 한다 주장했습니다. 그는 대상을 모두 제거하며 기호학적 추상을 극단으로 밀어붙입니다. 실험을 거듭한 끝에 가장 완전하고 순수한 형태인 정사각형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흰색 위의 흰색은 말레비치가 오랜 노력 끝에 도달한 궁극의 경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그림을 보면 하얀 사각형에 삼라만상의 진리가 담긴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색즉시공이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형상은 일시적인 모습에 불과하며 진정한 실체는 없다는 뜻입니다. 

 

러시아혁명후의 새로운 시대

말레비치는 러시아에서 태어나 모스크바에서 미술을 배웠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모스크바는 유럽에서 아방가르드 예술운동이 번성한 곳 중 하나였습니다. 말레비치처럼 극단적인 아방가르드 화가가 러시아에서 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러시아가 파리에서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습니다. 말레비치를 비롯하여 러시아 아방가르드 화가들이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입체주의, 야수주의에 이르는 미술사의 흐름을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말레비치는 서양미술의 흐름을 냉정하게 분석했으며 과학기술이 예술에 갖는 지배력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무 대상의 세계야말로 예술의 궁극적인 지향점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가 절대주의를 정립하는 데는 당시 러시아의 사회적 배경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로마노프 왕조를 무너뜨린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절대왕정 시대가 막을 내립니다. 새로운 유토피아가 다가올 것이라 믿었습니다. 새로운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이 예술가들은 새 시대에 걸맞은 미술관을 제시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후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난 후 러시아에는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서게 됩니다. 말레비치는 사회주의야말로 이상적인 정치체계임을 믿었습니다. 국립 예술학교의 요직에 취임한 그는 절대주의를 녹여낸 건축물을 만드는 데 집중하게 됩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