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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미술

서양 미술 에콜 드 파리 작품

by 볼로냐라이브러리 2021.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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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반에 시작된 1차 세계대전 전까지 파리는 세계 예술가들이 모이는 도시였습니다. 수많은 화가와 조각가, 평론가, 화상들이 파리에서 교류를 했고 새로운 예술운동이 야수주의와 입체주의처럼 발발했습니다.

 

에콜 드 파리 작품: 머리를 땋은 소녀

모딜리아니는 인물화로 유명한 화가입니다. 풍경화는 단 4점만 그렸으며 정물화는 그리지도 않았습니다. 갸름한 얼굴과 긴 목, 눈동자 없는 아몬드 모양의 눈은 모딜리아니의 포인트입니다. 단 머리를 땋은 소녀 작품은 예외입니다. 눈동자가 뚜렷하고 조그맣게 벌린 입술 사이로 치아도 보입니다. 평소에는 늘 모델의 입이 굳게 다물어져 있는 것에 비하면 정반대의 작품입니다. 모딜리아니는 지병이었던 결핵을 치료하기 위해 프랑스 남부 지방인 니스에서 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때 만난 한 소녀가 마음에 들어 모델로 요청했습니다. 모딜리아니는 특히 모델과의 심리적인 교감을 중시했습니다. 이 작품을 보면 소녀의 따뜻한 시선을 느낄 수 있습니다. 모딜리아니도 기욤과 교류하면서 아프리카 조각상을 접했습니다. 그는 아프리카 조각상이 선조의 무덤을 지키는 파수꾼으로서 영적인 기운이 깃든 창조물이라는 것을 알고 감명받게 됩니다. 아프리카 조각상을 보면 얼굴이 비정상적으로 길며 눈과 코는 단순합니다. 이러한 모습이 신비로움을 뿜어냅니다. 그가 그린 초상화 속의 여성들 역시 연약하면서도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을 풍기는 것을 보면 아프리카의 원시미술이 모딜리아니에게 깊은 영감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 모딜리아니는 1908년, 루마니아 출신 조각가이자 현대 추상 조각의 선구자인 콘스탄틴 브랑쿠시를 만나 조각 작업에 몰두합니다. 그래서인지 그가 그린 인물화는 조각상과 유사하기도 합니다. 미켈란젤로를 동경했던 그는 석상 조각에 전념하게 됩니다. 하지만 석상 조각은 재료비가 비싸며 힘들었고 작품은 잘 판매되지도 않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작업 중에 발생하는 먼지 때문에 결핵 마저 악화되자 1914년에 모딜리아니는 조각가의 길을 포기하게 됩니다. 

 

입체주의와 추상화를 부정하다.

유럽의 패권은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까지는 스페인 그 후에 네덜란드, 이탈리아로 옮겨갑니다. 하지만 예술과 문화의 수도는 19세기부터 프랑스 파리였습니다. 르네상스의 발상지인 이탈리아가 유럽 예술의 왕조로 있던 시절이 있었지만 프랑스가 15세기에 통일 국가를 이룬 뒤에는 역대 군주들이 이탈리아를 수없이 침공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처럼 뛰어난 화가를 비롯하여 요리사와 음악가들을 데려갔으며 메디치 가문에서 왕비를 받아들이면서 프랑스는 예술 강국으로 도약하게 됩니다. 19세기 미술품 애호가 알려진 나폴레옹 1세가 유럽을 정복한 시기에 그는 전쟁의 전리품으로 유럽 각지에서 수많은 미술품을 수집하여 루브르 궁전에 전시합니다. 덕분에 프랑스는 많은 예술품을 보유하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인 1920년대에 파리에서 활동한 외국인 화가들은 비주류였습니다. 그들은 본인만의 방식으로 독자적인 화풍을 만들어갔고 이런 이유로 그들의 양식을 하나의 트렌드로 분류하는 것이 불가능해졌습니다. 하지만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들의 작품에는 타국에 뿌리내리지 못한 이방인의 애환이 느껴졌습니다. 예술의 중심지인 파리를 동경해 고국을 떠났지만 이방인으로 파리에 머물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더욱 강하게 의식하게 되었으며 그들의 그림을 보면 비루한 현실 속에서도 고국을 추억하며 하루살이처럼 살아가는 마음이 전해지기도 합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전, 파리에는 제2의 벨 에포크가 도래하게 됩니다. 에콜 드 파리 화가들은 몽마르트와 몽파르나스에 위치한 값싼 주택에 살면서 당대 파리의 일상을 포착합니다. 화려한 파리의 뒷골목에 정처 없이 흩날리는 눈보라처럼 모여든 무기력한 청춘들. 에콜 드 파리 화가들은 화려한 도시 이면의 소외된 계층을 캔버스에 담기 시작합니다. 경제적 호황 속에 문화와 예술이 번창했던 시기, 그럼에도 여전히 현실은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에콜 드 파리 화가들은 사회 주변부를 맴돌며 고독과 박탈감에 빠진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모습을 투영했던 것 같습니다. 앞서 모딜리아니가 아프리카 조각상에서 영감을 받았듯이 피카소도 아프리카 조각상의 영향을 받아 입체주의의 걸작인 아비뇽의 처녀들을 완성하게 됩니다. 하지만 모딜리아니는 입체주의를 부정했습니다. 입체주의는 수단일 뿐 인간의 진솔한 삶을 다루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추상화에 관해서는 추상은 그저 보는 이를 피로하게 만들기만 한다며 독설을 퍼붓기도 했습니다. 이탈리아 북부지방인 리보르노에서 유대계 가문의 아들로 태어난 모딜리아니는 피렌체에서 미술학교에 다니면서 그림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모딜리아니는 평생을 술과 약물에 찌들어 살았습니다. 집시처럼 방황하며 자유분방한 생활을 했던 모딜리아니, 화려한 외모로 여성의 마음을 설레게 했으나 정작 파리의 미술계로부터는 홀대받았던 그는 지독한 가난과 질병 속에서 그림을 그리다 서른다섯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하지만 기욤은 그의 작품이 언젠가는 인정받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고 후세에 모딜리아니의 존재가 알려지게 된 것도 그의 덕분이었습니다. 현대 미술시장에서는 모딜리아니는 피카소 다음으로 작품 가격이 높은 화가입니다. 2018년 소더비 경매에서 그가 그렸던 누워있는 나부 작품은 1억 5720만 달러라는 기록을 세우게 됩니다. 이는 소더비 미술품 경매 역사상 최고의 낙찰가였습니다. 

 

비주류의 이방인들

들은 삶의 애환을 예술로 승화시켜 개성 넘치는 작품을 선보였고 독자적인 화풍을 꽃피울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보수적인 미술계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지만 에콜 드 파리 화가들의 작품은 현대에 이르러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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