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독일, 미국, 러시아, 프랑스 등 5개 국가를 중심으로 식민지 전쟁이 시작되던 20세기 초반에 서양미술도 함께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게 됩니다.
야수주의 작품 : 마티스 부인의 초상 혹은 녹색 선
<마티스 부인의 초상 혹은 녹색 선>은 제목 그대로 마티스가 본인의 아내를 그린 것입니다. 얼굴 가운데에는 굵게 녹색 선이 있습니다. 얼굴 왼쪽과 오른쪽의 색은 다르며 배경은 빨간색과 초록색이 강렬한 보색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물감은 덕지덕지 발라 엉성하고 거칠어 보이며 여인의 목둘레는 그리다 만 것처럼 보입니다. 마티스는 원색과 보색 대비를 거침없이 구사하여 모델의 인상뿐만 아니라 자신이 느끼는 모델의 내면까지도 표현해냅니다. 자연에서 본 색이 아닌 자신이 느꼈던 색을 사용한 것입니다. 단지 색채가 주는 강렬함을 전달하기 위해 마티스는 원근법을 무시하고 굵은 붓 터치를 보입니다. 필요시 피사체를 왜곡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작품을 보면 큰 거부감이 없지만 당시엔 파격적인 작품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도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마티스는 이 작품으로 회화에서 색채를 독립시키며 새로운 미학을 제시한 아방가르드 예술가로 입지를 다지게 됩니다. 그림의 색이 그리는 대상과 똑같아야 한다는 상식은 마티스 때 무너지게 됩니다. 마티스가 이런 색을 선택한 이유는 아무도 모르지만 야수주의 화가가 어떤 색을 사용하고 본인의 감정이다.라고 하면 관람객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고흐는 털 뭉치를 사용하여 보색 대비를 연구했고 20세기 초반은 인간의 뇌가 외부에서 받아들이는 빛을 어떤 색으로 인식하는지 분석하는 색채이론이 나온 시기입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고려했을 때 마티스가 단순히 마음 가는 대로 색을 고르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색이 가진 힘을 폭발시키기 위해 과학적인 색채 이론에 근거하여 신중하게 색을 골랐을 테죠. 이 무렵 화가들은 미술사를 배우고 시대별 유행한 사조를 익히며 본인의 예술 방향을 찾게 됩니다. 후기 인상주의의 혁신성에 매료된 예술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20세기의 새로운 미술을 이끄는 선두주자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했습니다. 마티스 역시 색으로 감정을 표현한 고흐와 고갱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는 한발 더 나아가 색채를 대상에서 완전히 독립시키면서 회화는 대상을 재현하는 것이라는 공식을 뒤집어버립니다. 거침없는 도전정신으로 대담했던 마티스, 그는 야수주의 선두주자에서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미술을 대표하는 인물로 주목받게 됩니다. 하지만 야수주의는 3년이라는 짧은 시간을 보내고 종말 하게 되는데 애초에 야수주의는 명확한 이론적인 배경 없이 인상주의와는 다른 무엇을 만들고자 탄생한 사조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야수주의 정신이 20세기 회화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마티스가 그렸던 그림은 단순하면서 과감한 색채 배열과 거친 붓 터치가 특징입니다. 하지만 누구보다 전통적인 회화 기법을 충실히 습득했습니다. 탄탄한 기본기와 훌륭한 능력 때문에 세세한 부분은 엉성해 보일지언정 전체적으로 보게 되면 조화롭고 질서 정연한 인상을 보여줍니다. 야수주의라는 명칭은 그림 속 색채와 붓질이 야수처럼 길길이 날뛴다는 의미로 붙여졌는데 정작 마티스는 안락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아내의 얼굴에 거침없이 녹색을 칠해 전 세계를 경악시켰던 마티스는 본래 녹색을 좋아했습니다. 자신의 아틀리에를 온통 녹색이 넘치도록 공간을 만들고 꽃과 거대한 관엽 식물이 가득하고 약 300마리가 넘는 새들이 날아다니는 그의 아틀리에는 거대 식물원과 같았습니다.
20세기 미술을 이끌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가 개최됩니다. 이때는 프랑스 미술 100년전이 열렸는데 신고전주의부터 인상주의까지 약 3,000점에 달하는 프랑스의 대표 회화와 조각 작품이 전시되었습니다. 기획전의 테마는 과거를 돌아보고 20세기를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마티스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미술사의 발자취를 돌아보며 앞으로 전개될 미술의 방향을 예견했던 것이었습니다. 만국박람회에서는 뤼미에르 형제가 발명한 영화 촬영기로 찍은 영화가 상영되었는데 독일 철학자 발터 베냐민은 사진기는 회화와 연극 등 전통적인 예술 작품의 위기감을 고취시켰다고 했습니다. 사진을 한 단계 뛰어넘은 영사기의 등장으로 마티스를 비롯하여 당시 화가들에게 위기감을 안겨주었던 동시에 미술의 새로운 역할을 찾게 됩니다. 새로운 미학을 창조하는 행위는 필연적으로 기존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이었기에 주류에게 냉대받기 쉬웠습니다. 고전주의의 틀을 깨고 18세기 미술의 중심으로 올라섰던 인상주의도 처음에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마티스를 비롯하여 야수주의 화가들이 1905년 제3회 살롱 도톤에 작품을 출품했을 때도 야만적이라는 조롱을 받았습니다. 그전까지는 오직 살롱만이 예술가의 작품을 발표하는 것이었지만 이때부터 다양한 기회가 열립니다. 폴 시냑과 조르주 쇠라가 창설한 프랑스 독립예술가협회 살롱전은 무심사 전시회로 누구나 자유롭게 작품을 출품할 수 있었고 야수주의와 더불어 20세기 미술의 양대 산맥인 입체주의도 살롱 도톤에 등장했습니다. 마티스의 작품은 주류 평론가들에게 조롱거리였지만 새로움을 찾았던 파리 예술가들에게는 전폭적인 지지를 얻게 됩니다. 그렇게 마티스는 새로운 미술을 향한 열망에 힘입어 20세기 미술을 선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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