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권력에 눈이 멀었던 가톨릭 교회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재건축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발행하는 실수를 하게 됩니다. 경비를 지원해주면 죄를 면해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교회를 비난했고 결과적으로 면죄부 발행은 종교개혁의 방아쇠가 됩니다. 마틴 루터는 가톨릭 교회의 부패를 열변하며 종교개혁운동을 이끌었으며 새로운 종교인 개신교를 탄생시킵니다. 거대한 역사의 파도에 미술도 휘말렸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하고자 종교화를 장려하게 됩니다. 그 결과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가톨릭 국가들은 그림을 더욱 역동적이고 극적으로 표현하여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감성에 호소합니다. 이것이 바로 르네상스를 대신하여 새로운 사조로 떠오른 바로크 미술입니다.
바로크 양식 작품: 우유를 따르는 여인
우유를 따르는 여인은 17세기 네덜란드의 소박한 삶의 한 장면을 그린 풍속화입니다. 페이메이르는 주로 가정에서 평범한 일생생활을 하는 여성을 묘사했는데 이 당시 네덜란드 여성들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페르메이르는 광학기기의 일종인 카메라 옵스큐라를 사용하여 그렸습니다. 카메라 옵스큐라는 핀홀 카메라 원리를 적용한 장치로 렌즈 대신 어두운 상자 속 작은 구멍을 뚫고 그 구멍으로 빛을 통과시키면 맞은편 벽면에 걸어놓은 캔버스에 풍경이 거꾸로 나타나게 됩니다. 캔버스에 일종의 밑그림이 그려지는 방식입니다. 페르메이르는 카메라 옵스큐라를 사용하여 빛의 상태를 정확히 포착했습니다. 그리하여 오차 없이 정밀하게 사물을 묘사하고 원근감을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이 장치를 활용하여 캔버스에 풍경을 똑같이 투영했다고 하여 누구나 사진처럼 정교한 표현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페르메이르는 최상급 실력을 지난 화가였습니다. 그의 재능은 정확한 묘사와 색채 표현입니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과 여성이 쓴 머릿수건, 도자기에서 흘러나오는 우유 등 사물에서 드러나는 생생한 질감 표현은 페르메이르의 경이로운 능력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또 그는 푸앵틸레 기법을 효과적으로 구사한 화가입니다. 푸앵틸레는 점묘법의 일종으로 작은 점들을 엷게 찍어 섬세한 빛의 효과를 나타내는 방식을 뜻합니다. 페르메이르는 이 기법을 활용하여 그림 속 대상들이 흡사 빛의 알갱이가 반짝이는 듯 묘사했습니다. 우유를 따르는 여인은 어느 부유한 한 가정집 부엌이었습니다. 집주인이 고용한 하녀를 대상으로 작품을 만들었고 그녀가 두르고 있었던 청치마를 표현하기 위해 황금에 필적하는 가치를 지닌 라피스 라줄리를 원료로 한 안료를 페르메이르가 아낌없이 사용한 것으로 보아 당시 네덜란드가 얼마나 부유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유를 따르는 여인을 둘러싼 논란도 있었는데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하녀가 고용주 남성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 일이 많아 이 그림이 누군가의 성적인 뉘앙스를 찾기도 했고 그와는 반대로 차분하게 우유를 따르는 모습이나 단정한 몸가짐을 보며 성실함과 근면함을 나타낸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페르메이르는 18세기에 접어들어 빠른 속도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습니다. 작품 수도 40점이 안되어 인지도가 낮았으며 널리 알려질 기회가 적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조용하며 고요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시민의 모습을 붓 터치로 그렸다는 것이 그를 북유럽 바로크 미술의 대표주자로 평가받게 됩니다. 바로크 시기에 네덜란드에서 유행한 풍경화 및 풍속화는 이후에 등장하는 사실주의와 인상주의에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또 19세기 한 평론가가 그를 재평가하게 되면서 지금의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실주의 화가 쿠르베와 인상주의 화가 모네 등이 프랑스에서 활약하게 된 이후의 일인데 이 들 역시 페르메이르처럼 동시대의 일상을 사실적으로 그렸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재력자 시민 계급의 탄생
16세기 후반, 네덜란드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게 됩니다. 17세기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인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여 동남아시아와의 무역을 독점했습니다. 당시 세계 최대 은 생산국이었던 일본에서 은을 수입하여 유럽에 독점 공급하던 나라도 네덜란드였습니다. 17세기에 네덜란드는 경제적으로 호황이었고 그에 따라 재력을 갖춘 시민 계급이 탄생하게 됩니다. 그들은 막강한 부를 앞세워 그림 수집에 힘을 씁니다. 페르메이르는 동인도회사의 근거지에 살았는데 이곳에서도 시민 계급이 미술 후원자로 급부상했고 화가들은 그들이 좋아할 만한 그림을 그렸습니다.
바로크 미술의 흐름
가톨릭 교회의 대안으로 등장한 개신교는 근검, 절약, 청빈을 강조했고 예수나 성인의 그림을 교회에 장식하는 것은 우상 숭배로 여겼기 떄문에 금지했습니다. 이처럼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한 개신교 국가들에서는 종교화가 자리를 잃고 있었던 가운데 가톨릭 국가들과는 결이 다른 바로크 미술이 꽃을 피우게 됩니다. 바로크 미술에는 두 가지 흐름이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은 유럽 최대의 무역도시였습니다. 교황이나 왕족이라면 교회나 궁전을 장식할 거대한 종교화를 의뢰했겠지만 시민 계급은 아무리 돈이 많다 하더라도 우리가 예상한 큰 집에서는 살지 않았습니다. 종교화에 관심도 없었으며 화가들은 자신들의 주된 후원자인 시민 계급의 취향에 맞추어 이들의 저택을 장식할 초상화나 풍경화를 집 크기와 맞게 그리기 시작합니다. 그중에서는 서민의 꾸밈없이 일상을 담은 풍속화가 가장 인기를 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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